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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도의밤 · 8화

물 없는 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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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갈대 사이에서 나왔다.

젖은 소매 끝에 손가락 다섯 개가 있었다. 그것이 물동이를 내려놓던 사내의 팔목을 붙잡았다.

사내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나는 짐을 던지고 달렸다.

“팔을 당기지 마십시오!”

물가에는 검은 형체 하나가 서 있었다. 옷은 누더기였고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젖은 머리카락 같은 것이 달라붙어 있었다. 갈대를 밟지 않는데도 몸이 가까워졌다.

나는 칼집으로 그 손등을 쳤다. 칼집은 아무것도 치지 못한 채 손을 통과했다. 그런데 손가락이 사내의 살을 파고드는 순간, 손목의 윤곽이 또렷해졌다.

이번에는 닿았다.

나는 칼집 끝을 손가락 사이에 밀어 넣고 비틀었다. 검은 손가락이 칼집을 감쌌다. 손바닥의 상처가 벌어지며 칼집이 미끄러졌다.

“받아!”

곁에 세운 분신이 사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나는 두 손으로 칼집을 눌렀다. 검은 손가락 하나가 벌어졌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팔을 뺐다.

분신이 그를 뒤로 밀었다. 뒤따라온 갑옷 차림의 남자가 사내를 어깨에 걸치고 달렸다.

빈손이 된 형체가 나를 향했다. 내가 물러서며 칼집을 가슴 앞에 세우자, 분신이 내 허리띠를 잡아 길 쪽으로 당겼다. 발이 물에 닿기 전에 땅으로 올라왔다.

그 뒤에야 물가가 달라졌다.

형체의 허리 아래로 널판이 보였다. 우리 쪽 흙길과 이어질 리 없는, 물에 잠긴 좁은 갑판이었다. 검은 손이 한 번 허공을 움켜쥐었다.

널판과 함께 형체가 가늘게 찢어졌다.

바람에 흩어진 것은 물방울뿐이었다.

나는 칼집을 든 채 서 있었다. 갈대만 흔들렸다. 사라진 널판이 다시 붙으면, 그 손도 돌아오는 걸까.

허리띠가 다시 당겨졌다. 나는 몸을 틀며 칼집을 들었다가 멈췄다.

“나다.”

분신이 손을 폈다.

“길로 나오라고. 아직 너무 가까워.”

나는 뒷걸음으로 두 걸음 더 물러났다. 분신은 나를 놀리지 않았다. 같은 것을 보고 놀란 얼굴이었다.


경계 근처 군영의 천막이 길 너머로 보였다.

어젯밤 묵었던 집에서 나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돛을 본 자리를 어떻게 설명할지만 생각했다. 사람을 찾으러 와서 저런 것과 맞붙게 될 줄은 몰랐다.

갑옷 차림의 남자는 사내를 길 위에 앉히고 팔을 살폈다. 바리데기가 다가가 물을 끼얹었다. 팔목에는 손가락 모양으로 검붉은 자국이 남았다.

“혼자 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남자가 말했다.

사내가 갈대밭을 가리켰다.

“누가 물 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요. 사람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목소리를 들었습니까?”

바리데기가 물었다.

“부르는 소리는 아니고…… 기침 같은 게.”

바리데기는 갈대밭을 한 번 보고 사내의 손가락을 움직여 보게 했다. 천으로 팔목을 감싸 주자 사내는 물병을 잡았다 놓았다 하며 제 손을 내려다봤다.

나를 도운 남자가 일어섰다.

“수색을 맡은 양규요. 먼저 뛰어들어 준 덕에 살았소.”

나는 칼집의 진흙을 털다 그를 봤다. 양규는 내 대답을 기다리면서도 부하의 젖은 소매를 조심스레 벗겨 주고 있었다. 방금 어깨에 사람 하나를 걸치고 달렸던 손이었다.

“홍길동입니다.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나는 어제 그린 종이를 꺼냈다. 물새호, 푸른 천을 덧댄 돛, 실종된 윤석. 길에서 보았던 것부터 말했다.

양규는 돛 그림에 손을 대지 않고 종이의 아래쪽을 짚었다.

“이 둑에서 봤소?”

“예. 이 방향으로 움직였습니다.”

“어제 해 질 때 여기서도 같은 돛이 보였소.”

그가 우리를 군영 쪽으로 데려갔다. 천막 뒤에 널판 세 장이 세워져 있었다. 각각 줄이 달려 있고, 줄 끝에는 길이가 다른 매듭이 묶여 있었다.

“이걸 물에 넣어 봤소. 저녁에는 두 번째 매듭까지 잠겼는데, 아침에는 첫 매듭도 젖지 않았지. 강물이 그만큼 빠진 건 아니오.”

이순신이 줄을 펴 봤다.

“널판을 건진 자리는 같았습니까?”

“말뚝을 박아 뒀소. 하지만 닿는 곳이 달랐소.”

양규가 내 그림 옆에 간단한 지도를 놓았다. 길 건너 낮은 논, 물을 뜨는 자리, 군영에서 갈대밭까지 이어진 발자국. 어제의 돛을 본 자리도 표시돼 있었다.

그림 두 장을 맞추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돛은 움직인 방향도, 나타난 높이도 달랐다. 그런데 푸른 덧댐은 같은 쪽이었다.

“배가 돌았다고 보기에는 좁습니다.”

이순신이 말했다.

“배가 아니라, 배를 보는 길이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아까 나타났던 갑판을 떠올렸다.

배가 이쪽으로 온 게 아니라 갑판에 닿는 길이 열린 것이라면, 저 손도 그 틈으로 뻗어 나온 걸까.

나는 천막 밖의 갈대밭을 봤다. 저 건너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다시 발을 들여야 했다.

정도전이 종이 가장자리를 눌렀다.

“이 길로 다니는 사람이 있소?”

“아직 없소. 다만 전에는 저편 나루로 가는 작은 배가 다녔소.”

“그 배를 아는 사공을 만나고 싶소. 우리가 물새호를 찾아도 돌아올 길을 마련해야 하니.”

그가 물길을 아는 병사와 함께 천막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림 옆에 돌아올 자리도 표시했다. 사람을 찾으면 그곳으로 옮겨야 했다.


“아까 그것도 여기 사는 사람입니까?”

천막을 나오며 바리데기에게 물었다.

바리데기는 팔목을 다친 사내가 누운 쪽을 돌아봤다.

“지금은 사람을 잡아당겼어요. 그건 분명해요.”

“원래 무엇이었는지는요?”

“오래 붙들린 흔적은 느껴지는데, 누구였는지까지 알 수는 없어요.”

그녀가 내 손에 묻은 물기를 봤다.

“제가 길을 안내했던 혼들은 저렇지 않았어요. 무엇 때문에 저 모습이 됐는지부터 알아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가 쪽으로 눈이 갔다. 젖은 손가락이 다시 갈대에서 나올 것 같았다.

“붙잡는 순간에는 칼집에 걸렸습니다. 그전에는 그냥 빠져나갔고요.”

바리데기가 칼집에 남은 자국을 살폈다.

“그건 기억해 둬요. 다음에도 같을지는 모르지만.”

“다시 나오면 우선 사람을 떼어 놓겠습니다.”

“저도 그쪽을 도울게요.”

우리는 양규의 병사들과 함께 조금 전 자리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누구도 혼자 앞서지 않았다. 뒤에서 줄을 잡고, 긴 장대로 바닥부터 짚었다.

분신이 장대를 들었다.

“네가 아까 맞힌 데가 이쯤이냐?”

“조금 오른쪽. 나는 그 옆에 있었어.”

녀석이 내가 가리킨 자리를 보다가 칼집 끝에 눈을 멈췄다. 옻칠이 벗겨지고 원래 금이 가 있던 끝부분이 더 벌어졌다.

“다음엔 네 손가락으로 벌려라.”

“다음이 없으면 좋겠다.”

장대가 갈대 안으로 들어갔다. 흙을 짚는 둔한 소리 뒤에 나무 두드리는 소리가 섞였다.

분신이 멈췄다.

“여기. 단단한 게 있다.”

이순신이 줄의 길이를 재게 했다. 나는 분신이 있는 곳까지 직접 가서 장대가 향한 자리를 확인했다. 얕은 물 아래에 널판 끝이 보였다. 곁에는 나뭇잎이 한 방향으로 흘렀다.

잠시 뒤 널판이 흐려졌다. 장대는 갑자기 더 깊이 빠졌다.

분신이 힘을 줘 도로 끌어당겼다. 장대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앞에는 원래 있던 갈대 뿌리만 남았다.

“잡고 있던 것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군.”

이순신이 매듭을 살폈다.

“그렇다고 사람이 서 있을 곳도 남는다는 뜻은 아니네.”

그가 장대 끝으로 널판이 사라진 자리를 짚었다.

“사람을 찾으면 기다리게 할 자리도 있어야겠군요.”

내가 말했다. 사람을 한 번에 다 태울 수 없다면 저런 널판 위에 남겨 둘 수는 없었다.

바리데기는 갈대가 꺾인 쪽과 사내가 팔을 붙잡힌 자리를 비교했다. 양규에게는 어제 사람이 걸어 들어간 적이 있는지 물었다.

없었다. 다들 돛만 보고 돌아왔다고 했다.

“그럼 저 안의 발자국은 우리 쪽에서 간 사람이 남긴 게 아니에요.”

그녀가 진흙의 움푹한 곳을 가리켰다. 맨발 하나가 눌린 듯한 흔적. 가장자리는 물에 풀어지고 있었다.

나는 발자국을 그렸다. 그 옆에 윤석의 이름을 쓰려다 붓을 멈췄다. 아까 손을 뻗었던 것도 손가락은 다섯이었다.

빈칸으로 두었다.


해가 넘어가기 전 작은 배 한 척이 도착했다.

정도전이 현지 사공과 함께 빌려 온 배였다. 배 밑에는 새로 막은 자국이 있었지만 널은 단단했다. 이순신이 직접 안에 들어가 무게가 쏠리는 쪽을 확인했다.

“내일 아침 물이 들 때 들어갑니다. 돌아올 곳은 저 돌 둔덕으로 하지요.”

그가 둑 안쪽의 높은 자리를 가리켰다. 양규는 병사를 남겨 줄과 물자를 준비하게 했다.

“배가 안 돌아오면 어떻게 합니까?”

나는 괜히 돌려 묻지 않았다.

이순신이 배에서 내렸다.

“먼저 남아서 버틸 곳을 확인할 걸세. 길을 찾기도 전에 사람을 모두 밀어 넣지는 않네.”

그는 물과 말린 음식, 덮을 천을 따로 묶게 했다. 들어갈 길은 짧게 열려도 구조는 하루 더 걸릴 수 있었다.

나는 그 꾸러미들을 배에 실었다. 하나가 물새호의 몫일 수 있었다.

짐을 다 싣고 분신을 거뒀다. 뻐근한 팔을 주무르며 천막으로 돌아오자 자청비가 바닥에 앉아 빈 자루를 펼치고 있었다. 안쪽의 푸른 실이 저녁빛에도 눈에 띄었다.

“찾으면 이걸 먼저 보여 주려고요?”

“얼굴부터 확인해야지요.”

그녀가 자루를 접었다.

“물을 먼저 줘야 할 수도 있고.”

그 말에 나는 물병의 마개를 다시 눌러 봤다.

밤에는 바람이 잠잠했다. 양규가 돌려준 그림을 무릎에 놓고 돛의 높이를 고쳤다. 어제는 그것만 찾으면 사람도 찾을 줄 알았다.

오늘은 조금 달랐다.

갈 수 있는 길, 버틸 자리, 돌아올 배. 우리가 하나씩 갖춰 놓은 것이 눈에 보였다. 그 덕에 내일을 기다릴 수 있었다.

잠들기 전 망을 보던 병사가 천막 밖에서 작은 목소리로 알렸다.

“돛이 다시 보입니다.”

나는 바로 뛰어나가지 않았다. 이순신과 함께 둔덕으로 올라갔다.

갈대 사이에 흰 천이 걸려 있었다. 이번에는 푸른 덧댐 아래로 검은 선 하나가 보였다.

배의 난간이었다.

그 난간 위에 사람이 팔을 올리고 있었다.

8화 끝

초기 원고 기준일 최종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