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차 목록

율도의밤 · 23화

지우지 못한 선

조회 — 오늘 —
글자 크기18

“어제 한 일을, 저 위에서도 하면 되는 겁니까?”

나는 도면 위에 손가락 세 개를 폈다.

“사람부터 빼낸다. 양쪽을 함께 푼다. 마지막 연결을 끊는다.”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순서는 같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얼굴이십니까?”

그는 작업 기록을 도면 옆에 펼쳤다. 같은 물길인데 새 종이에는 선이 하나 더 들어 있었다. 지금의 길만 잇던 부분에서 다른 쪽으로 뻗은 선이었다.

“어제는 같은 자리를 맴도는 길을 풀었죠. 저 위에서는 과거를 붙들려고 합니다. 늦으면 길을 열어 줘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 수 있어요.”

손가락을 접고 새로 그어진 선을 따라갔다. 그 끝에는 연이 살던 집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사람들을 데려오는 일만 생각했는데, 우리가 돌아올 지금의 나루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정도전이 새 기록의 한 부분을 짚었다.

“이것은 예전 도면에 없소.”

나무틀의 안쪽에 세 줄의 홈이 그려져 있었다. 우리가 창고에서 본 부품과 같은 모양이었다. 루크는 그 옆에 적힌 길이와 잠금 순서를 살폈다.

“현재의 두 장소를 붙드는 데서 끝나지 않게 고쳤네요.”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쪽은 찾은 과거의 자리를 붙들도록 되어 있어요.”

나는 연의 빗을 떠올렸다.

“빗은 연 씨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됩니까?”

“빗은 자리를 찾는 단서였어요. 계속 끼워 놔야 움직이는 열쇠가 아니고요.”

루크가 기록에 남은 위치 표시를 가리켰다.

“찾은 곳을 옮겨 적었으니, 이 표시로 다시 맞추려는 겁니다.”

빗이 연의 손으로 돌아왔을 때는 안심했었다. 하지만 그 빗으로 시작한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는 연의 집을 표시한 선에서 손을 뗐다.

이순신이 물었다.

“얼마나 붙들어야 실제로 바뀝니까?”

루크는 작업자가 가져온 설명과 옛 장치의 작동 간격을 맞췄다. 장영실이 보내온 물길 기록도 옆에 놓았다.

“본 수문과 양쪽 표지가 완전히 고정된 뒤 한 시간입니다.”

“그 전에는 보이거나 잠깐 겹치는 데 그칩니다. 그 상태를 한 시간 넘게 붙들면, 겨냥한 날에 이어진 현실의 일들이 바뀌기 시작해요.”

내가 나루지기에게 물었던 질문이 돌아왔다.

“연 씨만 달라지는 게 아니군요.”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한 사람의 날을 다른 사람의 날과 떼어 고정할 장치는 없습니다. 누가 어디서 만나고, 무엇을 하게 됐는지가 연결돼 있으니까요.”

나는 어제 창으로 본 마당의 깨진 화분을 떠올렸다. 그 집에 드나들던 사람, 연을 도왔던 사람, 여기서 연을 만나 살아온 사람. 우리가 보지 않은 날이 훨씬 많았다.

“연 씨가 싫다고 하지 않았어도 막았어야 했네요.”

내 말에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무틀에 비친 것은 마당 하나뿐이었다. 그 뒤에 몇 사람의 삶이 걸렸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루크는 한동안 옛 도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그가 손가락으로 문지르는 부분을 봤다. 손끝으로 지울 수라도 있는 것처럼 같은 선을 두 번 쓸었다.

“직접 만드신 겁니까?”

“이 지역의 끊긴 길을 잇는 부분은 제가 손봤어요.”

그가 답했다.

“여기까지 갈 줄은 몰랐습니다.”

“아무 일도 모르셨으니 책임이 없다는 뜻입니까?”

내가 묻자 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 말 하려고 꺼낸 건 아니에요.”

그는 새 기록의 부품 표기를 짚었다. 외부에서 받은 방식이라는 문구와 함께, 세 홈의 크기와 간격이 반복돼 있었다. 이전에 만들었던 것과 달라진 지점은 분명했다.

“고친 부분은 제가 안 한 일이지만, 제가 만든 것을 이용한 것도 맞습니다. 그걸 못 본 척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가 힘없이 웃었다.

“등불 손본 값만 받고 갈 수 있으면 편했겠죠.”

나는 옛 도면을 그의 앞에 도로 밀었다. 누가 처음 그었는지 묻는 것은 돌아온 뒤에도 할 수 있었다.

“지금 고칠 수 있는 건 무엇입니까?”

내 물음에 루크가 얼굴을 들었다.

“여기 남은 표지들을 원래 통로와 분리할 수 있습니다. 상류가 끊길 때 이 나루의 길까지 다시 조이지 않게요. 사람들이 피할 길을 열어 두는 일도요.”

“그걸 맡아 주십시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

정도전은 외부에서 온 기록을 따로 묶었다. 세 홈의 그림은 양규 쪽에도 보내 비슷한 것을 본 적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오늘 연락을 전하러 떠나는 사람에게 맡기되, 답을 기다리며 출발을 늦추지는 않기로 했다.

멈출 수 있는 수문이 이미 앞에 있었다.


연이 아버지의 상류 작업 목록을 가져왔다.

품삯을 보내는 데 썼던 명단이었다. 부품을 다루는 사람, 줄을 매는 사람, 식량을 가져가는 사람이 따로 적혀 있었다. 창고의 호위 여섯은 그 목록과 구별돼 있었다.

“여기 있는 분들은 싸우려고 간 게 아니에요.”

연이 말했다.

“제게 먹을 것 보낼 때 묶음을 나눠 달라고 했던 사람들이에요.”

바리데기는 그 가운데 수문 안쪽에서 일하는 사람을 표시했다. 누가 마지막에 나와야 할지, 어디서 얼굴을 확인할지 물었다.

작업자가 양쪽 표지 사이의 조종실을 짚었다. 수문을 여닫는 손잡이들이 모인 곳이었다. 거기서는 난간에 가린 서쪽 표지를 볼 수 없었다. 이순신은 양쪽을 볼 수 있는 물가에 손가락을 놓았다.

“배에서 중간 신호를 받겠습니다.”

이순신이 말했다.

“양쪽을 보고, 가운데 있는 길동에게 넘기겠소.”

자청비는 서쪽 둑의 그림을 오래 봤다.

“이쪽은 땅이 무너지면 사람들이 못 지나가겠어요. 제가 여기 갈게요. 대신 땅을 아는 분이 필요해요.”

현지 작업자가 자기가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겠다고 했다.

정도전은 동쪽 표지와 선착장 쪽을 맡았다. 사람들을 맞을 일꾼과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는 일을 함께 볼 수 있었다. 바리데기는 안쪽 사람들을 끝까지 데려오는 쪽을 골랐다.

나는 가운데 조종실을 봤다.

“저는 여기서 마지막 연결을 끊겠습니다.”

그곳에는 나루지기가 있을 것이다. 나를 먹이고 머물 자리까지 내주었던 사람. 그와 다시 마주하더라도 장치를 멈추겠다는 마음은 바꾸지 않을 작정이었다.

“우리 쪽에서 사람을 다 빼냈다는 신호를 먼저 보게.”

이순신이 말했다.

“시간이 모자라면요?”

내가 물었다.

그는 잠깐 나를 보고 답했다.

“그래서 해 지기 전에 들어가야 하네. 마지막 순간에 뛰어들어 잘되기를 바라지 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은 기다려도 되는 여유가 아니었다. 그 전에 준비를 끝내야 할 마지막 한계였다.

조종실 벽의 물시계로 시간을 잴 수 있다고 했다. 두 눈금 사이가 한 시간. 완전 고정이 시작할 때 물높이를 표시해 두기로 했다.

“시간만 보다가 사람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순신이 내게 말했다.

“그래서 사람 수는 바리데기 씨가 보고, 양쪽 상황은 여기서 받아 주는 겁니까?”

“그렇네. 자네 눈 하나로 다 하려 하지 말게.”

연이 명단의 한 줄을 고쳤다. 상류에 먼저 갔던 작업자 하나는 어제 이쪽으로 돌아왔고, 대신 다른 사람이 들어갔다고 했다.

바리데기가 고친 이름을 소리 내 읽었다. 연이 맞다고 했다. 나는 두 이름을 번갈아 봤다. 사람 수는 그대로였다. 숫자만 맞추고 나왔으면 한 사람을 안에 남겨 둘 수도 있었다.


사람부터 빼내야 한다. 양쪽을 풀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연결을 끊는다. 순서는 알았다.

나는 챙기려던 도면을 도로 폈다. 호위 여섯이 입구를 막으면 그 첫 번째부터 할 수 없었다.

“창고에서 본 책임자가 저를 압니다.”

내가 말했다.

“얼굴이 둘이 되는 것도 봤고요. 사람 하나가 빠져나오는 동안 다른 제가 붙들어 둔다는 것도 알 겁니다.”

이순신이 나를 기다렸다.

“그럼 그 사람이 믿는 대로 먼저 보여 주겠습니다. 제가 앞에서 붙고, 다른 제가 옆으로 갑니다.”

“같은 수에 다시 속기를 바라나?”

“아뇨. 안 속기를 바랍니다. 얼굴마다 입구를 막으러 오겠지요.”

나는 가운데에서 서쪽으로 손을 옮겼다.

“그 뒤에 비는 길이 필요합니다. 그 길로 작업자들을 빼내 주십시오.”

이순신은 바로 좋다고 하지 않았다. 사공을 불러 배가 붙을 돌턱을 다시 물었다. 나도 기다렸다. 종이에서는 비어도, 배가 못 들어가면 소용없는 길이었다.

사공이 닿을 수 있다고 답했다. 그제야 이순신이 도면 위에 손을 얹었다.

“우리가 먼저 도착해서 보세. 책임자 위치가 다르면 미끼도 바꾸는 걸세.”

정도전이 물었다.

“작업자들이 우리를 보고 달아나면?”

연이 내놓은 명단 위에 내가 칼집을 놓았다.

“칼 든 사람하고 공구 든 사람부터 구별하겠습니다. 그 앞에서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바리데기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대답이 없으면 제가 안으로 가볼게요. 숫자가 맞는다고 끝내지는 않을 거예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답을 듣고 나니 앞에서 버틸 때 무엇을 기다려야 할지 분명했다.

지난번 창고에서는 같은 얼굴 둘이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그 얼굴들을 보느라 막지 못한 길로, 다른 사람들이 나와야 했다.

23화 끝

초기 원고 기준일 최종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