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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도의밤 · 29화

역사가 견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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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쪽이 준비됐다는 신호를 받고도 칼을 내리지는 않았다.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와, 지금 끊으라는 신호는 달랐다. 나는 조종실의 고정줄 앞에서 이순신의 배를 봤다.

서쪽과 동쪽의 불빛을 받은 이순신은 잠깐 기다렸다. 안쪽 길에서 바리데기의 등불이 움직이자, 배의 긴 등불이 올라갔다. 마지막 사람까지 나왔다는 확인이었다. 문밖에서 버팀줄을 지키던 작업자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입니다.”

내가 말했다. 내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벽의 물시계를 봤다. 완전 고정이 시작할 때 작업자가 짚어 준 눈금에서 물이 올라와 있었다. 한 시간의 끝에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음 놓고 기다릴 만큼 많이 남은 것도 아니었다.

나는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밖에서는 과거의 담과 현재의 물길이 나란히 보였다. 나는 담 대신 배를 봤다. 이순신의 팔이 움직였다.

먼 곳의 불빛이 낮아졌다.

양쪽 표지를 함께 풀라는 신호였다.


서쪽에서 나무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이곳에서는 자청비의 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줄의 당김이 달라졌다. 한쪽에서 짓누르던 힘이 흔들렸다가 멎었다.

동쪽에서도 쇠가 부딪쳤다.

배의 등불이 다시 움직였다. 양쪽 표지가 빠졌다는 신호였다. 작업자가 조종실 아래의 걸쇠를 짚었다. 양쪽이 풀리면서 버팀줄에도 여유가 생겼다. 그는 줄을 걸쇠에 한 번 더 감고 문 안으로 들어왔다.

“둘 다 빠졌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사람은 나왔고, 양쪽도 풀렸다. 이제 이순신의 마지막 신호를 기다렸다. 가운데를 끊어도 되는지, 배에서 두 곳을 다시 확인하는 동안이었다.

잠깐이 길었다.

나루지기가 뒤에서 이름을 불렀다.

“길동 씨.”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 끊으면, 다시는 같은 날을 찾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은 내 등 뒤에 남았다. 그가 되찾고 싶던 마당은 우리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그리워할 곳이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사람들을 그 마당을 위한 대가로 세울 수는 없었다.

배에서 등불이 크게 한 번 움직였다.

마지막 사람이 나왔고, 두 표지가 풀렸다.

이제 내 차례였다.


나는 고정줄에 칼날을 댔다.

팽팽한 줄을 한 번에 내리치면 끊어진 끝이 튈 수 있었다. 작업자가 받쳐 둔 나무홈 쪽으로 줄을 밀었다. 나는 그가 안전한 거리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칼에 힘을 주었다.

섬유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손바닥의 상처가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픈 쪽을 덜 쓰려고 손을 바꾸려다가 멈췄다. 갑자기 자세를 바꾸면 칼이 미끄러질 수 있었다.

발을 단단히 디뎠다.

줄 속의 하얀 섬유가 벌어졌다. 몇 가닥만 남았다. 나는 숨을 멈추고 칼날을 같은 자리에 댔다.

두 번째로 칼을 당겼다.

고정줄이 끊어졌다.

받침 안에서 끊어진 끝이 세게 튀었다. 나는 몸을 낮췄다. 조종실의 큰 바퀴가 반 바퀴 돌다가 걸렸다.

물 위의 지붕이 길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자리를 바꿔 붙으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기와의 선이 풀리고 담이 흐려졌다. 오래전 마당을 비추던 빛이 물결에 섞였다.

나는 물시계를 다시 봤다.

끝 눈금에 닿기 전이었다.

작업자가 소리쳤다.

“풀렸습니다!”

나는 고정줄의 끝을 봤다. 다시 붙지 않았다. 걸쇠도 더 내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과거를 바꿨다가 돌려놓은 것이 아니었다.

바뀌기 전에 붙들던 힘을 끊었다.

그제야 숨이 쏟아져 나왔다.


바닥이 흔들렸다.

조종실 아래에서 물이 빠지는 소리가 커졌다. 과거의 풍경은 사라졌지만 지금의 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동안 이곳에 묶여 있던 물이 자기 길을 찾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뒤돌아 나루지기에게 갔다.

그는 빈 나무틀을 보고 있었다. 표정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손목을 묶은 짧은 줄은 기둥에 걸려 있었고, 발은 조종실의 낮은 받침에 닿아 있었다.

“나가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그가 나를 봤다.

“이제 와서?”

나는 그의 팔을 잡았다.

“지금 여기 계시니까요.”

전달자가 나루지기의 손목을 묶은 줄의 끝을 기둥에서 풀었다. 도망치거나 장치를 다시 만지지 못하게 손목은 짧게 묶은 채였다. 나는 칼을 칼집에 넣고 그의 한쪽 어깨를 받았다. 전달자가 다른 쪽을 잡았다.

나루지기는 처음에 발을 떼지 못했다.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한 걸음 움직였다. 그때 위쪽에서 나무 조각이 떨어졌다.

나는 그의 몸을 문 밖으로 밀고 어깨를 낮췄다. 조각이 바닥에서 튀었다. 작업자가 문을 받쳐 주었다.

셋이 계단으로 나왔다. 문을 받쳤던 작업자도 뒤따라 나왔다.

바깥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물소리가 훨씬 컸다. 아까 우리가 붙들던 버팀줄은 걸쇠에 남아 있었지만, 그 아래의 발판은 조금씩 기울었다.

“위쪽으로 붙어서 가십시오!”

작업자가 외쳤다.

나는 그의 말대로 한 걸음씩 옮겼다. 나루지기를 업을 만큼 힘이 남아 있지는 않았다. 그는 제 발로 걸어야 했고, 우리는 넘어지지 않게 받쳤다.

마지막 계단에서 나루지기가 휘청했다.

그의 손이 본능적으로 난간을 잡았다. 내가 물에 빠질 사람을 함께 끌어올리던 밤에 봤던 손이었다. 이번에는 자기 몸을 지탱하는 손이었다.

나는 그 위에 손을 얹어 발판 쪽으로 돌렸다.

“이쪽입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따라왔다.


선착장에는 작은 배가 남아 있었다.

이순신과 사공이 물살을 버티고 있었다. 바리데기는 이미 나온 작업자들을 큰 배에 옮긴 뒤 이쪽을 기다렸다. 자청비와 정도전도 돌아와 있었다.

얼굴을 보고 나서야 내 몸이 얼마나 긴장해 있었는지 알았다.

“모두 나왔습니까?”

내가 물었다.

바리데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여기 계신 분들만 타면 돼요.”

작업자가 먼저 배에 올랐다. 전달자가 뒤따랐다. 나는 나루지기를 배 안쪽에 앉히고 함께 온 사람들에게 넘겼다. 그의 손과 자리를 확인한 뒤에야 한 발 물러났다.

자청비가 내 팔을 붙잡았다.

“앉아요.”

나는 앉지 않으려고 했다. 아직 배가 떠나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다시 말했다.

“길동 씨가 서서 흔드니 이쪽으로 자꾸 기울잖아요.”

나는 그 말에는 바로 앉았다.

노가 물속으로 들어갔다. 이순신은 물이 세게 몰리는 가운데로 배를 넣지 않았다. 돌턱을 따라 비스듬히 빠져나가, 먼저 떠난 큰 배가 기다리는 넓은 곳으로 향했다.

작업자 하나가 배 가장자리에서 균형을 잃었다. 나루지기를 받치느라 비켜 섰던 탓이었다. 바리데기가 그의 팔을 잡았고, 정도전이 자리를 한 칸 옮겨 앉혔다.

나는 배 안에 고인 물을 작은 통으로 퍼냈다. 싸움이 끝났다고 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물을 퍼내는 손이 느려지자 자청비가 옆에서 다른 통을 잡았다.

“저는 칼을 들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내가 나루지기 쪽을 보며 물었다.

“그쪽은 맡은 분이 보고 있어요. 지금은 물이 더 빨리 들어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퍼냈다. 자청비의 통이 내 통보다 먼저 가득 찼다.

“이번엔 이쪽도 좀 이겨 봐요.”

“지금 저랑 겨루자는 겁니까?”

“물한테 지면 다 같이 빠지니까요.”

나는 허리를 더 굽혔다. 웃느라 흘린 것까지 다시 퍼야 했다.

큰 배에 가까워지자 사공이 줄을 던졌다. 저편에서 기다리던 일꾼이 받아 걸었다. 다친 사람부터 옮기고, 붙잡은 사람들은 별도로 받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작은 배의 바닥을 살펴 남은 짐이 없는지 봤다.

그렇게 하나씩 옮기고 나니, 급하게 내딛던 발이 멈췄다.

뒤에서 낮은 발판 하나가 떨어졌다.

나는 돌아봤다. 물이 하류로 흘렀다. 우리가 비워 둔 나루가 저 아래에 있었다. 그곳의 집들이 지금 어떤 모습인지는 여기서 알 수 없었다.

안전하게 옮긴 사람들과 언덕 위의 잠자리를 생각했다. 그래도 잃을 집과 짐이 있다는 사실은 남았다.

계획을 막았다고 물까지 멈추지는 않았다.


큰 배에 옮겨 탄 뒤 나는 칼을 다시 뽑아 제대로 닦았다.

손이 떨려 천을 여러 번 떨어뜨렸다. 이순신이 내게서 칼을 받아 날을 살폈다. 나는 이번에는 괜찮다고 우기지 않았다.

그가 칼을 닦아 내려놓고 물었다.

“시간은?”

“끝 눈금 전에 끊었습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작업자도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고정됐을 때부터 한 시간은 지나지 않았다. 눈금은 절반을 조금 넘은 정도였다.

이순신은 그 말을 듣고 물 쪽을 봤다. 대단한 승리를 알리듯 외치지 않았다. 돌아올 배와 남은 사람을 다시 확인했다.

정도전은 붙잡은 호위들과 나루지기를 구별해 앉혔다. 다친 곳을 먼저 살피되, 무기와 장치에 닿을 수는 없게 했다. 나중에 따져야 할 일을 여기서 끝났다고 하지 않았다.

바리데기는 마지막까지 남았던 두 작업자에게 물을 줬다. 한 사람의 종아리에 나무 조각이 깊게 박혀 있었다. 다른 사람이 그를 두고 나오지 않아 둘이 함께 늦었다고 했다.

바리데기는 두 사람 뒤에서 무릎의 천을 갈고 있었다. 흙이 묻은 손으로 매듭을 풀다 몇 번이나 놓쳤다. 나는 깨끗한 천을 집어 그 앞으로 밀었다. 바리데기가 나를 올려다봤다.

“기다려 주셔서…….”

작업자가 말을 꺼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 나왔다는 불빛을 봐야 끊기로 했습니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물을 마셨다. 바리데기가 내게 빈 물병을 내밀었다.

“기다려 주실 줄 알았어요.”

나는 병을 받아 옆의 통에서 물을 채웠다.

“사실은, 왜 이렇게 늦으시나 했습니다.”

바리데기가 내 손에서 물병을 받았다.

“저도 길동 씨가 못 기다리실까 봐 조금 걱정했어요.”

“제가요?”

“혼자 다 하려고 내려오실까 봐요.”

나는 대답 대신 코끝을 문질렀다. 딱 한 번 그러려 했다는 말은 못 했다.

자청비는 자기 바구니를 열어 씨앗 주머니가 있는지 확인했다.

그녀가 나를 보며 말했다.

“안 잃어버렸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웃음이 났다가 눈가가 뜨거워졌다. 무언가 큰 것을 지켰다는 말보다, 작은 주머니가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 먼저 몸에 들어왔다.

나는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려다 붕대를 보고 멈췄다. 바리데기가 마른 천을 건넸다.

물 위에는 이제 다른 날의 지붕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 배의 등불만 흔들렸다.

역사는 우리가 알던 쪽에 남았다.

그 밤을 견딘 사람들은, 예전과 똑같지는 않았다.

29화 끝

초기 원고 기준일 최종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