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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도의밤 · 17화

창 너머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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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을 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연이 나무 받침 위에 자기 빗을 올렸다. 오래 쥐어 윤이 난 손잡이가 햇빛을 받았다. 그녀는 손을 거둔 뒤 바리데기 옆에 앉았다.

“마당 오른쪽에 나무가 있었어요. 줄기가 조금 기울었고요.”

작업자가 연이 말하는 자리를 종이에 표시했다. 이전에 받아 놓은 집의 모습과 오늘 다시 확인하는 기억을 맞추는 것이었다.

나루지기는 딸의 말을 끊지 않았다.

“대문을 닫으면 아래가 조금 떴어요. 봄에 바람 불면 거기로 꽃잎이 들어왔어요.”

연은 잠깐 생각하다가 웃었다.

“제가 치우기 싫어서 문밖으로 다시 밀어 놓곤 했어요.”

그 웃음에 나루지기의 얼굴이 풀렸다. 두 사람이 같은 집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차단 줄을 잡았다. 손바닥에는 깨끗한 천을 한 겹 더 감았다. 맞은편 작업자가 매듭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짧게 보기로 했다. 연이 먼저 그만두겠다고 해도 바로 닫는다. 사람도 물건도 넘기지 않는다. 어제 확인한 약속을 다시 길게 읽지는 않았다. 각자 맡은 자리에 서는 것으로 확인했다.

루크는 뒤에서 나무틀의 움직임을 봤다. 이순신과 정도전은 지나가던 사람들이 장치를 시험하는 곳으로 잘못 들어오지 않게 길을 나눴다.

나루지기가 손잡이를 돌렸다.

빈 틀 가운데 빛이 모였다.


처음에는 물에 비친 집 같았다.

기와 끝이 흔들렸다. 벽의 선이 겹쳐 보였다. 그런데 나루지기가 작은 쇠턱을 맞추자 떨림이 줄어들었다.

마당이 나타났다.

흙이 마른 부분과 젖은 부분이 달랐다. 낮은 담 아래에 깨진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른쪽의 나무는 정말 조금 기울어 있었다.

나는 무심코 숨을 멈췄다.

화려한 궁궐도, 빛나는 신들의 땅도 아니었다. 누군가 날마다 쓸고 물을 뿌렸을 마당이었다. 그 평범함 때문에 눈을 떼기 어려웠다.

연은 말을 하지 않았다.

지팡이를 쥔 손이 무릎에서 들렸다가 멎었다. 바리데기는 그녀를 붙들지 않았다. 옆에 앉아 같은 곳을 보고 있었다.

“저 화분.”

연이 겨우 입을 열었다.

“깨뜨리고 나서 화나실까 봐 나무 뒤로 숨겼는데.”

나루지기가 웃었다.

“다 보였지.”

“못 보신 줄 알았어요.”

그녀가 웃으며 눈을 닦았다.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인지, 마당을 더 잘 보고 싶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줄을 놓칠까 봐 손을 고쳐 잡았다.

문 너머에서 누군가 나오지는 않았다. 어린 연이 뛰어다니지도 않았다. 그러나 연의 시선은 마당 구석에서 대문 밑으로, 대문에서 기울어진 나무로 옮겨 갔다. 없는 사람까지 보듯 오래 머무는 곳이 있었다.

나도 그 집에서 사는 일을 상상했다.

아침에 문을 나서도 출신을 캐묻는 이가 없는 집. 저녁에 돌아와 신을 벗으면 되는 집. 다른 사람의 옛 마당인데, 나는 금세 내 바람을 그 안에 들이고 있었다.

손안의 줄이 조금 움직였다.

나는 눈을 내리고 매듭을 확인했다. 내게 맡긴 일은 저 안에서 살 곳을 고르는 것이 아니었다.

연이 천천히 손을 들었다.

나루지기가 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줄에 힘을 주었지만 당기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은 틀에 닿기 전에 멈췄다.

“지금 저 나무는 없죠?”

나루지기가 대답하지 못했다. 잠깐 뒤 고개를 끄덕였다.

연은 손을 무릎 위로 돌려놓았다.

“조금만 더 볼게요.”

나는 시간을 살피는 작업자를 봤다. 아직 약속한 만큼은 남아 있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말을 더 보태지 않았다.


닫기로 한 시간이 됐을 때 내가 먼저 알렸다.

“연 씨. 이제 닫겠습니다.”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만 더 보게 두면 어떨까 싶었다. 지금 아무 위험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저 얼굴 앞에서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괜히 차갑게 느껴졌다.

나는 맞은편 작업자를 봤다. 그도 줄을 쥔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이 내 쪽을 봤다.

“네.”

나는 작업자와 맞춰 줄을 당겼다. 가운데 빛이 좁아졌다. 기울어진 나무가 먼저 잘리고, 대문과 마당이 뒤따라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담 아래의 깨진 화분이었다.

틀이 비었다.

나는 줄을 걸쇠에 고정하고 손을 폈다. 한참 힘을 주고 있었는지 손가락이 뻣뻣했다. 작업자는 양쪽이 모두 닫혔는지 확인했다.

연은 곧바로 빗을 가져갔다.

“조금만 더 보자고 할 뻔했어요.”

그녀가 빈 틀을 보며 말했다.

“저도 그러자고 할 뻔했습니다.”

나는 줄을 잡았던 손을 무릎에 문질렀다. 연이 나를 보더니 조금 웃었다.

받침에 놓기 전과 같은 빗이었다. 그녀는 손잡이를 문지르며 무릎 위로 가져왔다. 나루지기는 돌려달라고 하지 않았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아무것도 건너가지 않았다.

연이 빗을 고쳐 쥐었다. 손잡이의 흠을 엄지로 문질렀다가 멈췄다.

“이 흠은 그때도 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빗을 봤다. 연은 손잡이를 돌려 흠이 난 곳을 보여 주었다.

“손잡이요. 나무에서 떨어뜨려서 생겼어요. 그때는 이것만 망가졌다고 울었는데.”

바리데기가 조용히 웃었다.

“많이 아끼던 거네요.”

“네. 지금도요.”

연은 짧은 빗살을 손끝으로 한 번 튕겼다. 작은 소리에 혼자 웃더니 빗을 천에 싸서 품에 넣었다. 걸쇠에 고정한 줄에는 더 이상 힘이 걸리지 않았다. 매듭을 확인한 작업자가 이제 물러서도 된다고 손짓했다.

바리데기가 일어나겠느냐고 물었다. 연은 조금 더 앉아 있겠다고 했다. 우리는 의자를 옮겨 햇빛을 피하게 하고 한동안 옆에 머물렀다.

그런데 들어오기 전의 마음으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연은 그늘로 옮긴 의자에서 다리를 뻗고 쉬었다. 바리데기가 곁에 남았다. 나루지기는 빈 틀 앞에서 작업자에게 무언가 묻고 있었다. 손끝이 방금 마당이 보였던 자리를 따라 움직였다. 나는 그가 연 쪽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루크가 내 손바닥의 천을 풀어 줬다.

“손을 너무 꽉 쥐었네요.”

“놓칠까 봐서요.”

“다음에는 손도 남겨 둬요. 한 번 쓰고 버릴 물건 아니니까.”

이번 농담에는 웃음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는 더 웃기려 하지 않고 천을 내게 돌려줬다.


이순신은 물가의 낮은 돌에 앉아 있었다.

나는 옆에 앉아 그가 보고 있는 쪽을 봤다. 보이는 것은 오늘의 나루였다. 밥을 먹으러 가는 사람들, 젖은 짐을 말리는 일꾼들. 오래전의 집은 없었다.

“저런 걸 보시면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내가 물었다.

그는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아들 생각이 났네.”

나는 그쪽을 봤다.

“면이라고 했지.”

그는 이름을 아주 평범하게 말했다. 장군의 이름에 따라붙던 큰 전투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그가 더 말할 때까지 물가를 보고 기다렸다.

“그 아이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곁에 없었네.”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나라를 지킨 사람이라는 말은 떠올랐다. 누구나 아는 공을 늘어놓으면 위로가 될까 싶었다. 그러나 아들을 잃은 아버지 옆에서 나라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건, 그가 막 내어 놓은 이름을 다시 멀리 보내는 것 같았다.

나는 돌 위의 작은 자갈 하나를 발끝으로 밀었다.

“보고 싶으시겠지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물 위로 볕이 반짝였다. 나는 눈이 부신 척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가 표정을 감출 시간을 내 쪽에서도 만들고 싶었다.

그 뒤로 말이 한동안 없었다.

나는 그 침묵을 견디다가 조금 편해졌다. 당장 좋은 답을 찾아 줘야만 함께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순신이 먼저 내 손을 봤다.

“자네도 보고 싶은 곳이 있나?”

“아직 없는 곳이 더 가고 싶었습니다.”

내가 답했다.

“하지만 저 마당을 보니, 원래 있던 곳이 달라질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저 문 안에서라면 어머니가 고개를 숙이지 않아도 될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말하고 나서야 옆 사람을 봤다. 다른 집의 마당을 보고 남몰래 넣어 둔 바람까지 꺼내 버렸다.

“길은 닫아 놓고, 정작 제 마음은 그 안에 들여놓았군요.”

이순신은 내 손을 봤다. 줄을 쥔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놓지는 않았네.”

나는 손을 폈다. 그 한마디에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내 말이 끝나자 물가에서 아이 하나가 넘어졌다. 곁에 있던 여자가 얼른 일으켜 옷을 털어 줬다. 아이는 조금 울다가 다시 걸었다.

이순신이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안 된다고 해서 보고 싶은 마음까지 없어지지는 않더군.”

그는 쉬운 해답을 주지 않았다. 나는 그게 오히려 고마웠다.

주방에서 밥을 먹으라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순신은 내게 먼저 가라고 하지 않고 보폭을 맞췄다.

나는 돌 위에 놓인 그의 물병도 챙겼다. 몇 걸음 뒤 그가 빈 허리춤을 짚기에 병을 들어 보였다.

“제가 들었습니다.”

“그랬나.”

그는 웃으며 받았다. 나는 조금 더 천천히 걸었다. 물병을 잊어버릴 만큼 다른 곳에 다녀온 사람을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연은 밥을 조금 남겼다.

자청비는 억지로 더 먹으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국이 식기 전에 한 번 마시라고 했다. 연은 그 말에는 따랐다.

나루지기가 주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일어서려다가 연이 손바닥으로 자리를 짚는 것을 봤다.

“같이 계셔 주세요.”

연이 작게 말해 나는 다시 앉았다.

“보니 어땠니?”

나루지기가 물었다.

연은 그릇을 내려놓았다.

“좋았어요.”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등을 세웠다.

“아직 상류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나루지기는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딸을 봤다.

“본 수문이 맞춰지면 그날로 갈 수 있다. 네가 다치기 전에, 우리가 막으면 된다.”

연이 품에서 빗을 꺼내 무릎 위에 놓았다. 천을 풀지 않은 채 손잡이 쪽을 움켜쥐었다.

나는 입을 열려다 연을 봤다. 빗을 쥔 그녀의 손이 무릎 위에서 멎어 있었다.

연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17화 끝

초기 원고 기준일 최종 수정